건축학개론은 납득이의 키스 강연같은 짧은 영상이나 유연석과 수지가 자취방으로 들어가는 장면만 캡쳐로 봤었는데 교수님께서 시험 끝난 주에 감상문을 써오라며 과제를 내주셨다 쓰기 싫고 과제도 엄청 밀려있었던 지라 대충 썼었는데 후배 말로는 아마 자신의 논문에 쓰실 것 같다고 했었다. 그 다음 주엔 프린트해오라고 하시기에 해갔더니 발표를 시키더라. 제일 먼저 냈다고 내가 먼저 발표를 했는데 얼떨떨해서 제일 먼저 제일 대충 했었다 (예상치 못한 발표가 제일 싫은데..)
무튼 쓴 게 아까워서 그냥 블로그에라도 기록하려고 올린다
건축학개론의 주인공 승민은 건축사무소 직원이다. 한 번도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맡아본 적이 없다. 또 다른 주인공 서연은 음대 피아노과를 나왔지만 졸업하고 피아노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아나운서를 준비하다가 여러 번 낙방하고 의사인 남편과 결혼 후 별거를 하다가 이혼 후 위자금을 받고 건축사무소에서 일을 하고 있는 승민을 일부러 찾아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한 집을 지어달라고 부탁을 한다. 처음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거절하던 승민은 문제가 될 게 뭐 있냐는 상사의 말에 서연의 일을 맡기로 한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처음 그들이 만난 곳은 건축학과의 ‘건축학개론’ 수업에서였다. 서연은 음대지만 건축학과의 개론 수업을 듣게 되었고, 제주도에서 올라와 아버지의 친구 분네 집에 잠깐 얹혀살던 그녀와 같은 동네에 사는 승민과 금방 친해지게 되었다. 매주 교수가 내어주는 과제물을 구실로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 시절, 승민은 온몸으로 ‘나 서연이를 좋아한다.’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자 한 번 사귀어본 적이 없는 숙맥이었고, 인기 많은 서연 때문에 자신이 없었던 그는 제멋대로 서연을 오해하기도 한다. 바로 그가 서연에게 고백하기로 마음먹은 날에 말이다.
건축학개론의 마지막 수업 날, 승민은 서연에게 고백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낭설에 걸맞게 그의 고백은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서연을 노리고 있던 재욱으로 인해 짓밟혀져버렸다. 충격을 받은 그는 그 길로 친구 납득이에게로 가 서연을 욕했다. 그렇게 승민의 첫사랑은 끝이 났고, 아무것도 모른 채 서연의 첫사랑도 끝이나버렸다.
하지만 첫사랑이라는 것이 잊고 지내다가도 한 번씩 생각나고, 애틋해지지 않는가. 승민은 첫사랑 서연을 잊고 있었지만 그녀가 불쑥 자신의 앞에 나타남으로써 약혼녀가 있음에도 잠깐 흔들렸다고 생각했다. 서연을 위해서 건축 설계를 고치겠다고 우기고 약혼녀와 트러블을 겪고, 자신에게 넘기라는 상사에게 꼭 자신이 다해내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며 서연을 위한 집을 완공하게 된다. 그러나 승민은 흔들렸을 뿐, 약혼녀와 결혼을 예정대로 올리고 미국으로 간다. 한계효용의 법칙이 적용된 것이다.
한계효용의 체감의 법칙은 사건의 값이 커질수록 효용의 증가는 감소한다는 법칙이다. 이 때, 승민의 효용은 ‘어떤 사람을 선택해야 안정적인 선택이 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위험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갑자기 십 몇 년 만에 나타난 첫사랑 서연은 그에게는 값이 큰 사건이고, 그에 따른 효용은 자신과 미래를 함께 하기로 약속한 약혼녀보다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승민은 약혼녀를 선택했다. 모든 사람들은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를 겁쟁이라고 욕하진 않지만, 사람의 성격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과거 대학생 때의 승민이나 나름 성공한 사회인이 된 승민은 결국 위험한 상황을 회피해버린 것이다.
건축학개론 마지막 수업 날, 승민이 서연에게 고백하려고 그녀의 집 앞에서 기다리던 날, 그리고 건축학개론 종강파티가 있던 날이었다. 평소 서연을 노리고 있던 재욱은 술을 잘 못 마신다는 그녀에게 술을 자꾸 권했고 결국 취해버린 서연을 데려다준다는 명목으로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 취해서 의식이 없는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승민은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 그녀의 집에서 나는 소리에 분노에 차 친구에게로 바로 달려가 그녀에게 있었던 일을 말했다. 그 때부터 그녀는 썅년이 되었다. 승민은 서연을 계속해서 피하고 서연이 걸어오는 대화에도 그녀가 좋아했던 전람회의 앨범을 주며 “꺼져주라.”는 말을 하고 자리를 피한다. 그녀는 승민과의 대화를 원하지만 승민은 좀처럼 받아주질 않는다. 나는 왜 서연이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 건지 이해를 못하겠지만 승민에게는 그녀를 믿고 있었던 만큼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따지자면 제일 나쁜 놈은 술에 취한 서연을 추행한 재욱인데, 왜 승민은 그녀에게 화가 났을까? 혼자 북 치고 장구 친 것은 승민이고 서연은 계속해서 그의 삐삐로 연락을 했지만 받지 않았던 것도 승민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있는 것을 보고 기분이 나빠질 수는 있지만, 그만큼 그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어야했을까? 그녀와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도, 더 이상 손실을 원하지 않아서 -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서 - 원천봉쇄를 한 것이 아닐까. 승민이 조금 더 용기를 냈다면, 조금 더 알레의 기대효용이론의 역설처럼 애매모호함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면 둘이 결혼까지 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든다. 나의 유추일 뿐이지만.
불확실한 상황에서 우리는 효용이 아니라 가치에 근거하여 의사결정을 수행한다. 가치는 주관 및 자기의 욕구, 그리고 감정이나 의지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승민이 재욱과 서연을 목격한 그 날, 그는 친구에게 달려가서 서연을 욕하기로 의사결정을 한 것이다. 그 상황에서 승민의 가치는 서연과 재욱에게 화가 난 감정을 풀려고 서연을 쌍년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승민도 알았을 것이다. 서연과 재욱의 상황은 자신이 제대로 안 것이 아니라고, 불확실한 상황인 것이라고. 승민은 확인을 해 볼 생각은 않은 채 위험상황으로부터 회피만 하고 그녀로부터 손실 회피성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그 후로 그녀를 피하고 그녀에게 모진 말을 내뱉고 잊은 채로 살아온 것이다.
참 못난 남자다. 그렇게 자기가 좋아하던 사람을 한 번의 오해로 나쁜 사람을 만들어버리는 것이 쉬울까. 그런데 승민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지 않았을까. 바로 친구에게 달려가 그녀를 욕한 것은 자신의 무력함을 욕하는 것이라고, 사실 진짜 나쁜 새끼는 재욱이고 자신이라는 것을, 그저 자신이 마음이 편해지고 싶어서 그녀를 욕했다는 것을 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승민의 모습에 나를 투영해봤다.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땠을까. 나라면 이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까? 라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승민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하지만 영화 밖에서 제 3자의 입장으로 봤을 때는 과거의 승민이나 현재의 승민이나 변함없이 찌질 하고 이기적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감도 없었다. 정말 최악인 남자를 서연은 좋아해줬는데 서연이 조금은 불쌍하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하지만 뭐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었으니까 내가 판단을 할 이유는 없다.
승민이라는 캐릭터는 앞에 말했던 것처럼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결말을 완벽하게 해준 것은 승민이다. 과거, 서연이 좋아했던 전람회의 앨범을 주며 서연을 끊어냈었던 승민은 이번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서연과의 관계를 끊어냈다. 승민은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가면서 서연에게 택배 하나를 보냈다. 그 택배의 내용물은 CD 플레이어와 전람회의 앨범이었다. 서연은 곧바로 CD플레이어를 켜고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노래가 몇 소절이 나오고 영화는 끝이 난다. 과거의 승민이 서연과의 관계를 끊은 방법과 똑같이 하면서 이번에는 완벽하게 그녀를 끊어냈다. 서로에게 남은 앙금이나 미련 같은 건 이제 없다. 완공된 서연의 집에서 이야기를 하며 그들은 다 풀어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항간에 떠도는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라는 말처럼 그들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잊고 살아가면서 한 번씩 문득 서로가 떠오를 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승민과 서연의 이야기는 둘 만의 영원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